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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빈 종이를 넣었는데 미리보기 속에서는 누군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스캔 중지 버튼을 눌렀다.
화면 안의 그림자는 아직도 한 장씩 넘어가고 있었다.

지하 기록실의 스캐너는 원본 한 장을 유리판 위에 올리고 덮개를 닫는 구형이었다.
첫 야간 근무라 시험 삼아 빈 종이를 올렸고, 번짐이 생겼나 싶어 그 위에 한 장을 더 포개 놓은 참이었다.
모니터 받침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안내문이 끼워져 있었다.
야간 원본 스캔 담당자에게.
1. 시험 출력용 원본은 오른쪽 아래에 붉은 점이 찍힌 한 장만 사용하십시오.
종이가 얇아 보여도 다른 종이를 덧대지 마십시오.
2. 원본이 평평한데 미리보기 속 그림자만 들리면 즉시 스캔을 중지하십시오.
얼룩이 아니므로 유리판을 닦거나 원본을 뒤집을 필요가 없습니다.
3. 중지한 뒤에도 그림자가 움직이면 모니터의 전원을 끄십시오.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하면 앞서 읽던 장의 다음 면부터 이어집니다.
4. 모니터를 끈 뒤 덮개를 살짝 열어 붉은 점의 위치만 확인하십시오.
점이 담당자 가까이에 있으면 덮개를 닫고 퇴실할 수 있습니다.
점이 반대편에 있으면 종이를 돌리지 말고 그 상태로 두십시오.
5. “다음 원본을 넣어 주십시오”라는 알림이 떠도 아무것도 넣지 마십시오.
이 알림은 기계가 다음 문서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6. 시험 원본을 포함해 스캔실 안의 종이는 밖으로 가져가지 마십시오.
붉은 점이 없는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7. 두 장을 포개 넣었다면 원본을 꺼내지 마십시오.
첫 장은 그림자를 받아들이지만, 둘째 장은 그림자에게 이쪽 면을 내줍니다.
바닥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발로 펴지 마십시오.
나는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 덮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붉은 점은 내 쪽에 있었다.
그런데 두 장이었던 종이는 한 장뿐이었다.
빈 종이 아래쪽에 검은 사각형이 생겨 있었고, 사각형의 모서리가 손톱만큼 들려 있었다.
덮개를 놓자 기계 옆에서 알림음이 났다.
꺼진 모니터 대신 책상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원본을 넣어 주십시오.”
나는 주머니와 두 손이 비어 있는지 확인한 뒤 문으로 걸었다.
복도 조명 아래에 서자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 나왔다.
그림자는 내가 멈추자 멈췄다.
그 밑에 포개진 검은 사각형만, 바람도 없는데 모서리를 들고 다음 장을 기다렸다.
종이에 적힌 것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면 오자가 현실을 바꾸는 심야 인쇄소 괴담을 펼쳐 보자.
접수한 적 없는 물건 때문에 야간 근무가 꼬이는 이야기는 두 번째 접수증에 이름이 찍힌 시계수리점 괴담에서 이어진다.
다른 장소의 수칙은 장소별로 고르는 나폴리탄 괴담 모음에 모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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