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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내 일기장을 팔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책장만 빈 게 아니었다.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사진에서 내 얼굴이 하나씩 빠져 있었다.
그 가게는 책 상태를 보지 않았다.
주인은 표지 대신 마지막 장에 적힌 날짜를 확인하고 계산대 밑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주었다.
나는 이사 비용이 급했다.
읽지도 않고 서명하려는데 주인이 펜을 빼앗았다.
“여긴 읽은 만큼만 돌려받아요.”

헌책 매입 안내
1. 책에 적힌 이름을 지우지 마십시오.
이름이 없는 책은 가지고 오신 분의 것으로 처리합니다.
빌린 책이라면 계산대에 내려놓기 전에 말씀해 주십시오.
2. 일기장과 편지는 무게로 값을 매기지 않습니다.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에 며칠이 들어 있는지 셉니다.
비어 있는 날짜도 하루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날이라고 제외해 달라는 요청은 받지 않습니다.
3. 견적을 받으신 뒤에는 책을 다시 펼치지 마십시오.
방금까지 읽히던 문장이 낯설어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글씨가 본인 것인지 확인하려고 같은 문장을 따라 쓰지 마십시오.
4. 판매를 취소하시려면 영수증의 합계 아래에 직접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서명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신분증을 보고 쓰셔도 됩니다.
다만 신분증의 사진이 비어 있다면 서명란도 비워 두십시오.
그때부터는 물건을 돌려받으러 오신 손님입니다.
5. 동행인이 고객님을 모른다고 하면 설명하지 마십시오.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거나 둘만 아는 일을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계산이 끝나기 전까지는 가게 안에 앉아 계셔야 합니다.
밖에서는 저희도 고객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6. 영수증에 매입한 책보다 날짜가 많이 적혀 있다면 즉시 알려 주십시오.
오늘 이후의 날짜에는 아직 값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 금액을 먼저 받아 가시면 차액을 받으러 다시 오셔야 합니다.
저희는 그날 반드시 문을 엽니다.
7. 책을 돌려받을 때는 빠진 장수만 확인하십시오.
자신이 쓰지 않은 문장이 남아 있더라도 지우지 마십시오.
다음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는 그 문장이 고객님의 자리입니다.
종이를 다 읽고도 나는 책을 팔았다.
오래전에 쓴 일기였다.
싫은 기억을 돈으로 바꿀 수 있다면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주인은 내가 내려놓은 네 권 가운데 세 권만 가져갔다.
마지막 한 권에는 아직 날짜가 남아 있다고 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두 번이나 누구냐고 물었다.
장난치지 말라고 하자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사진첩을 열었다.
졸업식 사진에는 부모님만 서 있었다.
내 생일 사진에서는 케이크가 식탁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없어진 사람의 자리를 채우려고 누가 사진을 조금씩 밀어 놓은 것 같았다.
헌책방으로 돌아갔을 때 주인은 나를 못 알아봤다.
영수증을 내밀자 말없이 계산대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내가 팔지 않은 네 번째 일기장이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집에 두고 왔다.
마지막 장을 폈다.
아침에 분명 비어 있던 자리에 내 글씨가 빼곡했다.
오늘 헌책방에 처음 온 손님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 책의 주인이라고 했다.
나는 안내문을 끝까지 읽었느냐고 물었다.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생겼다.
읽은 만큼은 돌려주었다.
나는 계산대 안쪽에 서 있었다.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손님이 낡은 일기장 네 권을 내려놓았다.
내 사진첩에서 지워진 얼굴이었다.
알아보겠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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